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보어만 (문단 편집) === 패전과 이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보어만 괴벨스.jpg|width=100%]]}}} || ||<#ddd,#191919> 전쟁 말기의 보어만과 관료, 장군들[* 맨 왼쪽부터 친위대 여단지도자 [[베르너 나우만]], [[발터 풍크]][* 나우만과 괴벨스 사이에서 보인다.], [[요제프 괴벨스]],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보어만, 육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이다.] || 그러나 그런 천하의 보어만도 점점 기울어지는 전황은 어쩔 수 없었다. 독일의 패색이 깊어지자 보어만은 권력욕을 잃었고, 1945년 3월에는 힘러에게 지휘권을 박탈 당했다. 1945년 4월 22일에는 "총통께서는 현재 신경쇠약상태이시니 대신 그대가 지휘를 맡으라"고 괴링에게 무전을 보냈는데, 이것은 보어만이 정적제거를 위해서 취한 함정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괴링은 23일, 히틀러에게 지휘권을 요구하다가 히틀러에게 반역죄를 선고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물론 실행할 사람이 없어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그 외에 하인리히 힘러가 외국과 협상하고 있다는 내용의 라디오 전파를 히틀러에게 들려주어서 힘러를 실각시킨 것 또한 마르틴 보어만이 한 짓이였다. 그러나 침략해 온 독일군을 역관광시키며 독일로 쳐들어 온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위했고([[베를린 전투]])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보어만도 총통방공호의 쥐새끼 신세였다. 그래도 보어만은 끝까지 히틀러의 옆을 지키며 히틀러의 구두 명령을 공식 명령으로 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히틀러가 자살을 결심하자, 보어만은 괴벨스, 크렙스와 함께 히틀러의 유언장에 증인으로 서명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은 5월 2일 독일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전날인 5월 1일 밤, 보어만은 히틀러의 유언장 사본을 지참하고 몇몇 나치 인사들과 총통방공호를 나와 탈출을 시도했다. 같이 탈출하던 동료는 그 과정에서 그가 소련군의 포격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그 목격자는 이후 보어만이 죽은 것처럼 쓰러져있는 모습을 봤다고 증언했으나, 급박한 탈출과정이었기에 실제 사망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이날 이후 살아있는 보어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운명에 대해 여러 설이 나돌았다. 남미로 탈출했다거나 또는 원래 소련 스파이였기 때문에 소련으로 사라졌다는 풍문도 돌았다.[* 독일군의 소련정보 전문가이자 서독 시절 정보국장을 역임한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보어만은 소련 스파이가 확실하며, 그가 전후에 소련에 살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자기 회고록에 남겼다. [[https://news.joins.com/article/1301860|#]]] 또 [[아돌프 아이히만]]은 보어만은 남미에 살아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연합국뿐만 아니라 후의 서독 정부도 그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추적했으나 그의 행적은 끝내 묘연했다. 그가 궐석한 가운데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는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라질로 도망쳐서 나치 잔당들을 모아 재건을 꾀하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이후 27년이 지난 1972년, 베를린 근교의 한 공사 현장에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된다. 유골을 수습하여 치아와 골격 일부를 조사해 보니, 해당 유골이 종전 이후 모습을 감춘 보어만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골이 발견된 장소가 이전 목격자들이 증언한 내용과 부합했으며, 유골의 치아에 청산가리 캡슐의 흔적인 유리 조각이 발견되었고 신장과 골격적인 특징도 보어만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보어만의 친지 중 한 명의 협조 하에 미토콘드리아 DNA 검사가 진행된 결과 이 유골이 보어만의 것으로 확정되었다. [[https://www.nytimes.com/1998/05/04/world/new-genetic-tests-said-to-confirm-it-s-martin-bormann.html|#]] 이를 종합하면 베를린을 빠져나가다가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부상이 심한 상황에서 소련군을 만나자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독약으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소련군이 발견했으나, 그들은 시체가 나치의 주요인사인 보어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의 민간인들을 시켜 시신을 부근에 묻어버렸는데, 시신을 매장한 독일인 역시 그가 보어만이라는 것을 몰랐으나, 그와 같이 자살한 의사의 시신을 함께 묻으면서 의사의 이니셜이 적혀있는 의료 가방을 챙겼다. 그는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이 매장한 의사의 유족을 찾았는데, 해당 의사가 당시 총통 관저에서 근무했고 보어만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보어만의 유골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도 유골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근거로는 [[베를린 전투]] 당시에는 수십만의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매장되었기에 그 속에서 보어만의 시체를 찾기란 불가능하며, 대표적인 것으로 뼈에 묻어있던 흙이 유골이 발견된 지역의 흙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골이 발견된 지역은 노란 모래흙인데 뼈에 묻어있던 흙은 붉은 진흙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딴곳에 묻혔다가 이장된 게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다. 또 보어만의 유골 치아에서 발견된 아말감은 전후 치과치료에서 행해진 흔적이기에 인골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DNA검사를 통해 유골이 보어만의 것임이 공식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음모론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 보어만의 유해는, 1999년 [[네오 나치]]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독일 정부에 의해 화장되어 발트해에 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